이번 15회를 맞이한 2인극 페스티벌 참가작 ‘고사’는 극단 ‘Theatre201’의 이명일 연출가와 영화 ‘해무’의 김민정 작가의 콜라보레이션 작품이다. 두 사람은 비슷한 색을 가진 예술가라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장르의 예술적 재료를 사용하며 풍부한 연출력을 가진 연출가와 인간의 심리와 내면을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표현하는 작가의 만남은 작품에 대한 궁금증을 한없이 끌어올렸다.
연극 '고사' 포스터
공연은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로 회사 사무실에 고립된 두 주인공이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김팀장은 유일한 문을 열면 방사능에 노출되어 죽기 때문에 문을 열면 안 된다며 나가려는 주진우를 강력하게 저지한다. 반대로 그럴싸한 이야기로 세뇌당한 주진우는 존재 할리 없다는 외부인의 모습을 보며 실존인지 신기루인지 혼란스러워하는데 그 둘에게 보이는 것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마른 나뭇잎의 변화뿐이다. 과연 이 둘이 우리에게 주는 질문은 무엇일까? 그 둘의 혼란은 실존과 신기루, 혹은 진실과 거짓의 갈등뿐인 건가?
연습 중인 배우 오재균, 문창완
배우 오재균
Q. 마른 나뭇잎의 의미는?
문창완(이하 문) : 제목이 고사잖아요. 생각이 마른다는 뜻인데, 나무의 생각이 마른다면 어떻게 표현이 될까요? 나무가 마르면 잎이 먼저 마르잖아요. 물론 극중에서는 방사능에 노출된 증거라고 우기는 이미지지만... 나뭇잎은 마르고, 시간이 지나면 푸른 잎으로 돋아나지만, 생각이 말라버린 나는 더 이상 다른 잎으로 바뀔 수가 없는... 대비되는 이미지를 마른 나뭇잎으로 표현했어요.
오재균(이하 오) : 원래 제목이 ‘마른 나뭇잎’이었어요. 고사는 부제였고요. 근데 우리가 바꿨어요. 마른 나뭇잎이란 제목은 너무 직설적인 것 같아서...(웃음) 이 친구의 말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말라버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어요. 정말 죽을 때가 돼서 마른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 약을 뿌려서 그런 것일 수도 있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이건 이렇게 돼서 마른거야’라고 정의를 내려주면 ‘너가 이렇게 믿어야해’라는 식으로 계속 세뇌를 당한다면, 다른 이유일 수도 있는데, 맹목적으로 믿게 된다는 거죠. 우리 사회에도 그런 부분이 많이 있어요. 정치적 문제도 있고요. 국정 교과서도 많은 문제가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강요하고, 생각을 세뇌시켰을 때 ‘진실은 그게 아닌데, 아닐 수도 있는데, 분명 다른 진실이 존재할 수 있는데, 우리는 세뇌를 당해서 갇혀 살 수 있다.’
이런 것을 은유적, 상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게 마른 나뭇잎이에요.
Q. 이 작품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오 : 작가가 시켜서 했어요. (웃음)
문 :어... 음... 작가가 제 와이프에요(웃음) 2인극 페스티벌 작품을 썼는데, 이 캐릭터가 차별성이 있었으면 했는데 마침 연극하시는 형이 오랜만에 복귀를 한다기에... 저랑 키 차이도 있고, 느낌도 달라서 둘이 하면 작품이 재밌어지고 시너지가 생길 것 같았어요. 생각의 충돌이 보이는 반대적 성향이 있으니까 좋을 것 같았어요.
오 : 신체적으로 보이는 차이가 있죠. 캐릭터는 반대로 가야하니까 이런 것에서 오는 콘트라스트에서 어떤 재미가 있겠다 싶어서 절 섭외한 것 같아요.
Q. 주진우 역할의 매력을 꼽아보자면?
문 : 김탐정도 마찬가지지만, 주진우라는 인물은 굉장히 일반적인 사람이에요. 그리고 줏대도 없어요.
오 : 순진한 사람이죠.(웃음)
문 : 그렇게 되고 싶거든요. 웃을 때는 실컷 웃고, 슬플 때는 울고, 5장을 지나면서 김팀장과 진우의 역할이 바뀌는 타이밍에 느껴지는 변화의 부분들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오 : 두 캐릭터가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가장 매력적인 것은 역할 바꾸기가 된다는 거예요. 본질은 같은데, 사실 주진우도,김팀장도 순진한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직장 상사들이 그렇거든요. 자기들도 배운 건데, 가르치려하고, ‘날 따라와, 따라오면 성공이야.’라고 해요. 하지만 결국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고, 자신 또한 여기에 얽매여 있는 사람일 뿐이죠.
초반에 겉보기에는 김팀장이 악역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죠. 예전에 많은 분들이 이런 얘기를 했었어요. ‘연민이 느껴져야, 진정한 악역이다.’ 김팀장의 매력이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약한 악당이죠.
Q. 캐릭터가 결국 한 사람을 나누는 느낌이군요.
저희가 작품 구성할 때 그 얘기를 했어요. 자아 분열로 볼 수 있다고...
Q. 연습하면서 힘들었던 부분?
오재균 : 나이 먹고 뛰려니까...(웃음) 10년만 젊었어도 하루에 두 세 번씩 돌겠는데... 이제는 한 번만 하면 쳐져요. 술, 담배를 끊어야 되나 싶어요.(웃음) 육체적인 힘듦은 작품이 좋기 때문에 어떻게든 할 수 있어요.
Q. 몰입하기가 어려웠던 부분은?
오재균: 이명일 연출가님의 스타일 자체가 움직임이 많아요. 가만히 앉아서 하는 대사의 연극 스타일을 선호하지 않아요.우리는 ‘이건 가만히 앉아서 대사만 해도 충분히 전달이 될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지만 연출가님은 여기에 하나씩 더해요. 움직임을 추가한다던가, 무대 배치를 바꿔보면 의미가 더 재밌어지고 확장이 되고, 이걸 거부하려고 해도 이게 맞으니까...(웃음)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 수 없는 거죠. 계속 뛰어 다녀야하고... 제가 예전에 했던 작품들은 대사 위주였는데, 이 작품은 움직임이 중요하고 많아져서... 그렇다고 이 작품이 특별히 힘들다는 건 아니지만, 기존에 하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좀 힘든 부분이 있었죠.
Q. 작품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문 : 음...미진아?(웃음)
오 : 궁금한 게 있는데, 작가가 와이프라고 그랬잖아요. 미진이라는 아이와 과연 얘가 무슨 관계가 있었기에. 작가가 이름을 미진이라고 했을까....
문 : 민정이라고 할 순 없잖아! 자기 이름인데!(웃음)
오 : 빨리 질문에 대답해!(웃음)
문 : '미진아, 결혼해 줄래?' 이 대사가 제일 좋았어요.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모든 게 허물어진다. 의심은 모든 걸 망쳐, 자기 자신도. 나는 믿어야 된다. 나는 믿어야 된다.” 이 말이 주진우에게는 가장 절실한 말이었어요.
비하인드 스토리인데, 마지막까지 혹시 이 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라는, 불분명하지만... 만약 진우가 나가서 미진이한테 청혼을 했을지, 이런 생각들이 들면서 이 안에 미진이한테 청혼을 하고 결혼을 하는 삶이 더 만족스럽고 완성된 삶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렇다면 이 곳을 지키고 싶고 더 절실하게 잡고, 외부를 차단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오 : 작품 전체적으로 봤을 때 김팀장 캐릭터가 자신에게 진솔하게 말하는 부분이 딱 한 번 나와요. 그 전까지는 계속 강압적이고 설득을 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으로 나오는데...
“공포에는 냄새가 없어, 색깔도, 실체가 없다.” 예를 들어 죽음이라는 것도 죽기 전까지는 느끼지 못하는데, 우리는 이 공포를 항상 느끼잖아요. ‘이러다 죽으면 어떡하지?’ 이런 실체 없는 공포 때문에 우리는 무언가를 꾸미고, 좇기고, 잡히지 않는 것들인데 반응하고 괴로워하고... 이 대사가 재밌었어요.
연습 중인 배우 오재균(좌), 문창완(우)
직접 이야기를 나눈 두 배우는 무대 위의 모습과 사뭇 다르게 유쾌하고 아주 장난기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작품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자세에서 관객들과 좀 더 원활하게 질의응답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 두 배우의 앞으로 작품에 더 집중해 봐야겠단 생각이 든다. 좋은 작품에서 두 배우를 또 만났으면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의심’이었다.
주진우의 ‘신기루’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진실을 찾아내는 불확실한 과정에서 사실 가장 필요한 첫 번째는 의심하는 방법이다.
마지막 끊어진 수화기를 들고 주진우가 하는 ‘의심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라는 말은 단편적인 ‘의심을 하지 말자’라는 메시지보단 결국 마지막까지 올바른 의심을 하지 못 하도록 고착된 세뇌의 승리, 안타까운 모습이다.
*역시나 재밌는 연출
매번 이명일 연출가의 작품을 보며 느끼는 것이지만 참 조명 연출을 재밌게 잘 한다. 창문으로 보이는 마른 나뭇잎 조명은 공연 중간 중간 그 크기가 점점 커지는데, 마지막에는 무대에 꽉차버린 마른 나뭇잎이 마치 만개한 꽃처럼 보인다. 결국 꽃까지 피워버린 주진우의 마른생각인 것 같다.
무대 위 두 배우가 서로 열심히 논쟁을 한다. 무대 왼쪽 벽에는 배우 단 한명의 그림자 밖에 없다. 결국 한 인물임을 보여주는데, 배우 한 명의 그림자 움직임을 2개로 나누기도, 거리상으로 큰 그림자와 작은 그림자를 만들어 귓가에서 맴도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연출되는 부분도 아주 좋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석에는 빈 컵라면의 개수가 쌓여간다. 공연 중간 부분에서 주진우는 김팀장이 했던 말을 되풀이하듯 인격이 뒤바뀌기 시작할 때 쯤 빈 컵라면의 개수는 줄어들어 시점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 외에 무대 속에는 재미난 것들이 많이 배치되어있다. 그런 부분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한 공연이었다. 배우들의 작은 움직임과 소품의 위치까지 세세하게 신경 썼음을 느끼며 연출가의 지끈지끈 했을 두통이 전해 받은 것만 같다.
내용이 무거운 질문을 한다. 하지만 배우들은 센스 있게 그 질문들을 가볍게 쳐 내며 밸런스를 맞추려 한다. 어쩌면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 했기에 무게가 불어났을지도 모르지만 그 속의 진짜 질문을 관객들은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현재 역사를 단 하나의 사고, 시점으로 고착시키려는 역사 국정화. 그것은 김팀장이 주진우에게 처음 심어준 ‘의심하면 안 되는 사실’의 시작과 같다. 역사는 누구의 한 관점에서 쓰인, 사실 진실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교육과목이기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의 여러 관점으로 최대한 객관화 시켜야 한다. 역사의 객관화, 선택의 자유, 그리고 올바른 의심을 아예 하지 못하도록 차단시키는 ‘역사 국정화’의 미래는 극중 마지막에 주진우가 말라버린 사고로 파괴된 모습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 어떤 것이 노출되었는지, 그리고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며들 ‘위험한 생각’을 인지하도록 적절한 질문을 했던 이번 작품에 대해 감사드린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극단 theatre 201 페이지 : https://www.facebook.com/theatre201
글, 사진, 인터뷰/ 이우정
편집/ 안지수 anjisoo@interviewfin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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